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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W91.ST02. ‘조금만 더’ 라는 함정

대부분 사람들이 스스로 문헌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나름대로 연구하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기술의 산출물이 나오고 나서야 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에 쥘 수 있고, 머리에 쓸 수 있고, 또 입거나 걸칠 수 있는 수많은 기술의 산출물들을 경험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산출물들을 즐기면서 살게 된다. 이전 것보다 조금 더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더 화려하기도 하고, 또 조금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자신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고, 더 멋있기까지 했다. 새로운 기능이 하나씩 추가되면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롭다는 것에 완전히 빠지게 되고, 남이 가지지 않은 자신만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즐기며 지내 오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산출물들이 부담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기술의 새로운 산출물이 너무 자주 바뀌다 보니 새로운 것이 제공하는 기능을 습득하기 위해 시간을 자주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아지면서, 멋져 보이는 것이 많아지면서, 신기한 것들이 많아지면서 그 기술의 산출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면서 집중해야 하는 대상들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아도 그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렇게 많은 것에 집중하고 배우지 않아도 기술을 즐길 수 있었던 옛날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기술을 익히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었던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오랜 시간을 들여 익히고 또 익혀야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고,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한 번 익힌 기술을 충분히 사용하기도 전에 새로운 기술이 너무 자주 소개되어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의 사용에 대해서 익혀야 하는 반복적인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술의 사용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새롭기 때문에 익혀야 하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매뉴얼이 무섭기만 한 것이다.

사실 매뉴얼은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다. 최신 핸드폰을 사면 예전보다 훨씬 두꺼운 매뉴얼이 같이 따라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매뉴얼 안에 글자는 더 작아지고 있다. 그 말은 알아야 할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새로운 기술적 산출물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획득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미래의 궁극적인 ‘서비스’로 정의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서비스’라는 것의 시작이 기술적 산출물로부터 시작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향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서비스’는 한 개인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결정되는 결과가 ‘서비스’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요구와 필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미래의 ‘서비스’는 ‘서비스’라고 불리지 않고 지원과 도움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된다.

이렇게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기술적 산출물들이 나타나게 되면 그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 사람들은 100% 그 기술로 다가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시간을 기술을 습득하며 지내게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예 필요도 없는 그런 기능들이 제공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산에 갈 때 결코 쓰지도 않을 물건을 배낭 속에 넣고서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사용하지 않는 기능을 위해 더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을 지불해야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기능이 만족스럽지만, 두꺼워져 가는 매뉴얼에 대해서 사람들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많이 넘었다. 이제는 기술들이 점점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두렵기까지 하다. 더 멋있고, 더 기능이 많고, 더 고가이지만, 맞춰진 구색과 비례하여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것들은 좀 알아서 해 주기를 바라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기술적 산출물이 나에게 필요한 이유가 진정으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능 때문인지 아니면, 그 기술적 산출물이 나에게 있음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인지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하는데, MASERINTS와 같은 성격의 미래의 디지털 공간은 나 만을 위한 공간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사실 남에게 보일만한 것도 없다. 또 사람의 의식 안에도 없다. MASERINTS는 사람의 의식 안에 머물지 않으려고 한다. 드러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남에게 보여줄 것도 사실은 없다. 그래서 새롭고 좋은 것도 어느 정도껏, 이제는 두렵기까지 하다.

■ The Computer for the 21st Century, Mark Weiser, 1991, https://www.lri.fr/~mbl/Stanford/CS477/papers/Weiser-SciAm.pdf

■ Calm Tech, Then and Now, John Seely Brown, https://medium.com/re-form/calm-tech-then-and-now-deddb05697cf

>>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조율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Mark Weiser 박사와 함께 Calm Technology의 철학을 세운 John Seely Brown은 그의 글인 「Calm Tech, Then and Now」를 통해 사람들이 기술을 설계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글에서 “관심과 주의력을 기울인다”는 의미의 ‘Attending’과 서로의 리듬을 맞추고 뿜어내는 주파수를 맞춘다는 의미의 ‘Attunement’를 구분하며, 이것이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기술과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격(格)’을 결정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기술이라는 것이 단순히 손에 쥐어 진 편리한 도구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존엄성을 보호하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고결한 동반자가 되는지, 그 격을 판가름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Attending’은 특정한 대상에 의식의 초점을 맞추는 행위이다. 이는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손전등을 켜서 하나의 물체를 비추는 것과 같다. 손전등이 비추는 그 지점은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그 주변의 맥락은 모두 어둠 속에 묻히고 만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알림을 확인하거나 컴퓨터 화면 속의 오류 메시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면, 사람들은 바로 이 ‘Attending’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상태에서 기술은 사람들의 주의력을 강렬하게 요구하며, 사람들은 그 기계적인 명령에 응답하기 위해 삶의 다른 흐름을 잠시 멈추어야만 한다. 이 때 발생하는 것인 ‘멘탈점프’인 것인다.

반면 John Seely Brown이 이야기한 ‘Attunement’는 악기를 조율하거나 오케스트라가 서로의 음을 맞추는 것처럼, 주변 환경과 자연스러운 공명 상태에 들어가 나의 의식이 가지고 있는 주파수와 주변 환경이 가지는 주파수가 같아져 하나가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조율을 뜻하는 ‘Attunement’는 개별적인 정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그 리듬에 동화되는 상태를 말한다. 대상이 가지는 존재가 대해 나의 물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맥락 속으로 들어와 동화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숲길을 걸을 때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나 바람의 감촉을 일일이 분석하며 걷지는 않지만, 주변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며 평온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 같다. 내가 이미 형성한 나의 삶의 흐름의 맥락 속으로 주변의 변화가 들어 온 것이다.

John Seely Brown은 여기서 기술 역시 이러한 ‘Attunement’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이 사용자의 시야 중심부에 나타나 “나를 봐!”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훌륭한 배경음악처럼 사람들의 삶과 결을 맞추며 배경으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이 사람들의 감각과 조화롭게 조율될 때, 사람들은 컴퓨터에 예속되지 않고도 그 혜택을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Attending’을 강요하는 기술은 당연하게 사람들의 인지적 자원을 소모시키고, 또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되지만, ‘Attunement’를 지향하는 기술은 사람들에게 정서적 안정과 평온함을 제공하게 된다.

John Seely Brown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에 주의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풍부하게 주변 공간과 조율의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Mark Weiser의 여러 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다.

기술이 인간의 내면적 리듬을 존중하고 그 흐름에 스스로를 맞출 때, 비로소 사람들에게 도구로 등장하여 그것이 단순한 디바이스를 넘어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John Seely Brown의 이러한 철학적 성찰은 기술이 사람을 지배하려 드는 오늘날, 사람들이 잃어버린 삶의 여유가 주는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