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 나 만을 위해 지원과 도움을 제공하는 나의 삶 속에 들어와 사는 그런 디지털 공간을 원하고 있다. 물론 누구나 이런 디지털 공간을 원할 것이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다른 디지털 공간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잘 흘러가던 일상생활의 단절이 점점 거추장스럽고 심지어 싫어 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음성이나 손짓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요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순간으로 인한 작고 순간적인 일상생활의 단절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미를 잘 짚어 보고 넘어갔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나의 명령과 조작에 의해 그런 디바이스와 컴퓨터들이 움직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서비스’라는 의미의 개념을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상의 기능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내가 집중하면서 수행하던 일에서 빠져나와 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상에게 가서 서비스를 얻기 위해 나의 주의력을 빼앗긴다는 것(1)이다.
사실 나는 나의 집중력을 내가 해야 할 일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끊임이 없이 쏟아 붓고 싶다. 하지만 서비스를 받기 위해 이 집중해야 하는 방향이 잠시나마 바뀐다는 것이다. 내가 집중하고 있는 일에 따라서 나의 집중력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즉 내가 완수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있는지, 아니면, 그런 일들의 진행을 도와주어야 할 도구로 향해 있는지, 어느 것으로 향해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이 집중되는 순간들이 내가 원래 해야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원래 해야 하는 일이 나의 삶의 주된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이 집중되는 순간들을 자주 빼앗긴다는 것은 그 만큼 내 삶의 단절이 발생한다는 것이고, 그 단절이 주는 물리적 그리고 정신적인 에너지 소비와 회복은 모두 내가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앱을 이용하는 것도 나의 일상의 하나가 될 수 있고, 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휴대폰의 앱을 열어 검색하기도 하고, 정보를 획득하기도 한다. 그런 단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앞으로 다가올 세상, 지금보다 더 빽빽한 디지털 공간들로 꽉 차게 될 세상에서 사람들의 복잡한 삶의 많은 여러 부분에 지금과 같은 디지털 공간이 주는 서비스를 획득하기 위해 이런 단절들을 수없이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면, 그런 작은 단절들이 모여서 일상 생활의 흐름을 아주 심하게 끊어 버리는, 그래서 정신적으로 겪어야 할 ‘전환비용’은 물론, 실제 삶 속에서 겪어야 할 시간과 여유의 손실은 커다란 정신적이고 인지적인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결국 정작 해야 할 일은 작은 시간만 할애가 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이 도구를 찾고, 도구를 배우고, 도구를 일에 적용하는 데 소모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멋있는 시계를 벽에 걸려고 기쁜 마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 벽에 박을 그 적당한 못 하나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알맞은 망치를 찾느라 정작해야 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버리고, 그 순간은 망치와 못을 찾는데 모든 생각이 집중되고, 그것이 스트레스로 변하고, 점점 압박감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멋있는 시계를 벽에 걸어 보려고 했던 기쁜 생각은 없어지고, 도구를 찾는 것이 주된 작업이 되어 버려서, 결국 서비스를 받기 위해 본래의 일보다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소개될 디지털 공간은 점점 도구 때문에 정신적인 ‘Mental Jump’나 시간이 더욱 허비되는 그런 개념을 지양해야 한다(1). 못과 망치를 찾느라 힘이 모두 빠지고 피로가 쌓여 정작 멋있는 시계를 걸어 보려 했던 희망의 생각은 빨리 이 일이 끝이 났으면 하는 피곤한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서비스라는 것은 더 이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상의 기능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고, 서비스를 받아야 할 주인공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위의 예를 들면, 누군가 적당한 못과 망치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면 멋있는 시계를 벽에 거는 것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만족감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Mark Weiser 박사가 ‘Ubiquitous Computing’에서 주장하고 있는 미래의 디지털 환경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미래의 디지털 공간에서는 오히려 서비스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고, 서비스를 받을 주인공에 대한 지원과 도움이라고 표현되어야 한다.
미래에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세탁을 하게 될지, 또 TV를 보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디지털 공간만큼은 소위 ‘서비스’로 인해서 일상생활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를 어느 정도 알아서 해 줄 수 있는 집사 같은 살아있는 디지털 공간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의 “집사와 같은 디지털 공간”이라는 개념은 198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Mark Weiser 박사가 제안했던 ‘Ubiquitous Computing’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집사’는 자신이 화려해지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고, 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 나를 위해 자연스럽고 원활하게, 그리고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흐름에 엮어져 매끄럽게 도움을 주는 존재일 뿐이다.

Mark Weiser 박사가 제안했듯이 컴퓨터가 사람들의 주변 공간에 녹아 들어 조용히 사람들을 지원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며, 사람들을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개념이다(2).
서비스가 아닌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 되어야
아래 그림은 미래의 서비스는 점점 서비스 받을 주인공의 요구와 필요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서비스’는 “지원과 도움”으로 변하고, 미래로 갈수록 사용자(User)의 범위는 줄어들고, PTS(Person to be served)의 범위는 늘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즉, 나는 미래의 디지털 공간에서는 사용자의 입장보다는 PTS의 입장이 될 상황이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서비스’가 나의 의식을 사로잡아 그 순간에 나의 주의력을 빼앗아 버린다. 그런데, PTS의 입장에서는 그 ‘서비스’라는 것이 나에 대한 지원과 도움으로 변하고, 게다가 PTS는 그런 지원과 도움이 있었는지조차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PTS가 삶의 흐름에 쏟고 있는 집중력을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PTS는 삶의 흐름에 어떤 단절도 경험하지 않게 되며, 그저 여느 때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의미를 사용자라는 표현 하나에 담기에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PTS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상태를 구분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가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집사 같은 디지털 공간을 자주 상상한다. 오히려 나는 그 집사가 나를 위해 무엇을 지원하고, 어떤 도움을 얼마만큼 주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일상생활의 흐름을 단절시키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 지원과 도움이 나의 일상생활에 잘 엮어져 녹아 들어가 있다면 말이다.
언급된 각주의 내용
(1) The Coming Age of Calm Technology, Mark Weiser, John Seely Brown, 1996, https://veryinteractive.net/pdfs/weiserbrown-thecomingageofcalmtechnology.pdf
(2) Ubiquitous Computing, Mark Weiser, August 16, 1993, https://rasmusbroennum.wordpress.com/wp-content/uploads/2009/02/ubiquitous-computing-mark-weiser-1993.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