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주변의 앱과의 상호작용을 위한 디지털 공간들을 이용하는 그 모양새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치 서비스를 얻기 위해 주변에 떠다니는 작은 섬들 사이를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 섬에서는 이런 서비스, 저 섬에서는 또 다른 서비스를 받기 위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어떤 섬에 가면 좋을 수도, 또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섬은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즉, 각각의 앱 자체로는 유용할 수도 있겠지만, 디지털 공간들이 사람들과 엮여 있는 모양새는 매끄럽게 통합된 모양새는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디지털 공간들의 분리가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인 단절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서비스를 얻기 위해 디지털 공간으로 들어갈 때, 혹은 하나의 디지털 공간에서 또 다른 디지털 공간으로 전환될 때, 이 전환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의 본래 살아가는 삶의 흐름에서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단절을 경험하는 이유로는 전환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삶의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을 지탱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이 순간을 ‘전환’을 위해 모두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디지털 공간은 내가 그 공간에 있는 일정한 시간 동안 ‘나’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어떤 디지털 공간도 ‘나’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이나 여기까지 흘러온 과거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 동안 나를 점유하게 된 디지털 공간은 자신이 의도된 흐름 위에 내가 편승하도록, 그래서 내가 그 섬을 떠나지 못하도록, 나의 아주 조그만 어떤 움직임이라도 분석하여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나를 자신의 의도에 더 맞도록 만들기 위해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는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의도된 흐름에 나를 올려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세탁 앱’은 내 빨래가 언제 끝났는지 알려 줄 수 있고, 나의 “일정 앱”은 오후 3시에 내가 한가하다는 것을 알려 줄 수 있고, 내 “약 복용 앱”은 내가 이미 약 복용시간을 놓쳤다는 것을 알려 줄 수 있고, 내 “소셜 앱”은 친구가 나의 게시물에 반응했다는 것을 알려 줄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기술적인 서비스는 각자 나름의 좁은 범위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어떤 앱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등에 대한 하나의 지속적인 이해로 그 단편화 된 조각들을 하나로 묶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 디지털 공간들이 나의 관심을 선점하기 위해 벌이는 경쟁 속에 휘말린다고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삶은 어떤 ‘일’들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좋아해서 하고 싶은 일이든, 완수해야 하는 업무에 관련된 일이든지 간에 그런 일들을 연속적으로 해 가면서 일상생활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인생도 만들어 간다. 그러나 일관성 있게 잘 흘러가던 내 삶의 흐름이 잠시 끊어지는 순간, 즉 서비스를 얻기 위한 디지털 공간과의 상호작용은 내 삶의 흐름에 단절을 경험하게 하고, 그 단절된 삶의 흐름의 양 끝을 다시 매끄럽고 부드럽게 잇고 원래의 삶의 흐름으로 돌아오는 것은 모두 나의 수고와 책임이 된다.
수십 개의 버튼을 눌러, 수십 개의 디바이스를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디바이스들이 제공하는 디지털 공간이 나의 삶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들의 목적에 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고도 휴대폰으로 온도 조절기를 설정할 수 있고, 세탁을 시작할 수 있고, 주차 요금을 결제할 수 있지만, 여전히 내 삶의 흐름의 단절에서 오는 많은 거추장스러움과 해야 하는 일이 있음에도 나의 집중력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 놓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제거는 전적으로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