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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경험의 발견과 창출

        “경험의 발견과 창출”을 위한 두뇌의 반응을 느껴 보기 위해 시뮬레이션 하기 전에,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이 바로 차고 넘치게 많은 종류의 다양한 ‘속이 검은 디지털 공간’들과 그들을 있게 하는 기술들에 대한 것이다.

        우선 디지털 공간과 그것들을 있게 하는 기술들이 너무나 내 주변에 많고, 겉이 너무 번지르르해서 나도 모르게 그런 기술에 종속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나도 그 안에서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존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디지털 공간과 기술에 대한 현명한 판단은 어쨌거나 두뇌가 깨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욱 더 많은 여러 ‘속 검은 디지털 공간’들이 복잡하게 겹치는 환경에서 내가 살게 될 것이다. 둘러 쌓여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여러 디지털 공간 속에 그들이 나눈 카테고리 안의 하나의 구성원이 되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겹겹이 쌓인 다층적인 ‘속 검은 디지털 공간’들에 둘러싸여 살게 되면, 그런 복잡한 디지털 공간들과 어떤 인터랙션을 하면서 지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디지털 공간이 점점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디지털 공간은 위험할 수 있다. 우선 내가 그들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간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고, 나를 고정점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여야 한다는 것이다.

        MASERINTS도 디지털 공간이다. MASERINTS는 DAGENAM의 개념가지고 디지털 공간에서 PTS인 ‘나’를 위해 필요한 일을 수행한다. 이런 환경에 살아가면서 PTS가 남기는 많은 흔적들과 PTS가 겪게 될 무수한 경험들을 수집하고, 분리하고, 다른 조합으로 재결합하여 가능한 모든 조합의 ‘간접경험’들을 만들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두뇌가 하는 일보다 확장된 결과를 가질 수 있을 수도 있다. 이 무수히 많은 ‘간접경험’들을 가지고 PTS가 필요로 할 것들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즉, 무수한 경험을 한 것과 같이, 그리고 PTS와 오랜 동반자로써 PTS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PTS에게 필요한 지원과 도움을 바로 필요한 때에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원과 도움을 차분하고, 부드럽고, 섬세하게 그리고 주변 맥락에 맞게 어떻게 제공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

        그렇게 MASERINTS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PTS를 이해하기 위해 동반자처럼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VPTS를 제공하고, 그리고 PTS의 그 당시의 필요에 맞춰 조정되고 반응하는 VCC와 VAFF와 같은 터미널 시스쳄도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MASERINTS는 PTS와의 매끄러운 인터랙션을 위한 UCA(Ubiquitous Computational Access)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MASERINTS도 위험한 ‘속과 겉이 다른 검은 디지털 공간’이 되는 것일까? 우선 어떤 하나의 디지털 공간에 사람들을 자기네들이 만든 카테고리로 나누어 그 구성원으로 만들어 끌고 가는 그런 ‘속이 검은 디지털 공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MASERINTS는 진정으로 각각의 PTS를 위한 디지털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전적으로 한 PTS를 중심으로 디자인된 개인화된 디지털 공간이 되려는 것이다. PTS와 동행하면서 PTS에게 동반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PTS들이 MASERINTS의 디지털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MASERINTS의 디지털 공간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공간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 MASERINTS는 모든 PTS들에게 개인화된 공간을 언제 어디서라도 제공한다.

        개인화된 디지털 공간이란 PTS만을 위해 존재하는 디지털 공간을 의미해야 한다. 어떤 디지털 공간처럼 플랫폼이 되어 사람들을 자신들이 만든 카테고리로 나누어 그룹으로 나누고 그 안에 하나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MASERINTS는 각 PTS와 직접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것은 MASERINTS가 PTS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MASERINTS는 사람을 얽어매는 보이지 않는 그물이 아니라, 사람을 감싸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PTS의 삶에 같이 동행할 동반자가 되려고 한다. 그렇게 속이 검은 디지털 공간들이 나에게 달려 들 때 나를 보호해 주는 그래서 내가 숨쉴 수 있는 그런 디지털 공간이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디지털 플랫폼이 한 개인에게 맞춤화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일시적으로 중심에 두는 것뿐이다. 그러니 적어도 MASERINTS와의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여기서, 디지털 기술과 나의 삶이 공존 될 때, 우선 그런 공존이 어떤 의미로 나에게 다가와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그 기술에게 너무 의존하게 되지 말아야 하고, 종속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기술은 나에게 그저 도움을 주는 그런 기술이 되어야 한다. 나의 삶의 흐름에 필요한 지원과 도움을 위해 기술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지, 기술의 생존을 위한 흐름 속에 내가 종속되어 흘러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이 또 등장하게 되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려고 한다. “이런 기술이라면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또는 “이 기술은 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려는 것일까?” 즉, 어떻게 그 새로운 기술을 직면해야 하는지를 우선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그 기술을 좋아하는 지, 싫어하는 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기술을 내 삶의 흐름에 허용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로 나온 질문들이다. 왜냐하면, 그 기술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느 쪽으로 든, 내 생각, 느낌,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즉,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또 그것은 나의 인간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롭고 신기하고, 편리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거꾸로 내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을 해 보면 더욱 이해가 될 수 있다. 즉, “이 기술이 내가 되기를 바라고,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데 도움이 될까?” 이렇게 질문해 보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결정에 대한 것이다. 자칫하면, 내가 그 기술을 제공한 대상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만 할 것이고, 내 가치관을 뒷받침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가치관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기술을 믿어야 할지, 인도해야 할지, 아니면 제한해야 할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은 ‘속이 검은 디지털 공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속이 검은 디지털 공간은 내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을 멈추게 되면, 점점 그 영향이 더 커지며, 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가까이 있는 그 기술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면서 내가 알아차리기 전에, 나의 마음, 가치관, 관계에 은근 슬쩍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기술은 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라고 계속 질문하면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셈이다. 단순히 두려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일상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이 분명히 더 많이 숨어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기술과는 달리,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기술들 중에는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기 보다는 나에게 달콤한 사탕 하나를 주고 그로 인해 그 맛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점점 조여와서 그물에 꼼짝 못하게 걸려들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만이라고 두뇌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디지털 공간이 진정으로 나를 위한 세상인지는 판단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디지털 공간이 나를 존중하는 공간일지, 아니면, 그저 나를 이용하는 디지털 공간일지, 그리고 나의 필요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을 지, 아니면, 내가 그 세상에 맞춰져 가고 있는 지, 이러한 질문들은 두뇌가 깨어 있어야 판단할 수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할 용기를 가져야만 답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인공지능’ 시스템이나, Ubicomp과 같은 기술이 나의 일상의 일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우려가 되는 것은 만약 나의 두뇌가 습관에 갇혀 나도 모르게 굳어져 간다면, 주변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디지털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새로운 디지털 세상이 온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려오고, 그리고 실제로 디지털이 꽉 찬 새로운 디지털 세상의 징조는 이미 일부 보이기도 한다. ‘인공지능’, ‘증강현실’, Ubicomp 등과 같은 기술은 어디를 가 봐도 쉽게 접하는 이야기가 되었고, 물론 완전히 내 주변에 와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일부가 이미 와서 주변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MASERINTS의 디지털 공간 안에서의 스토리텔링은 기술적 산출물들이 가지는 기능으로부터 시작된 그 기능에 대한 ‘서비스’라는 개념을,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요구와 필요에 의해 제공되는 진정한 또 다른 의미의 ‘서비스’의 개념, 즉 더 이상 ‘서비스’라 불리기 않고 지원과 도움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이 되었다.

        MASERINTS가 제공하는 디지털 공간은 나의 삶 속에서 나와 인터랙션 하면서 계속해서 점점 더 나의 삶의 흐름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MASERINTS의 디지털 공간 안에서는 PTS로 존재할 내가 중심이 되고, 나에게 지원과 도움을 제공하며, 나의 삶의 흐름이 안정될 수 있도록 영향을 줄 것이다.

        나도 다른 이들처럼 자주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가 그런 간절함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내가 세상 속에서 제대로 세상에 푹 젖어 세상이 바라는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세상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MASERINTS는 내가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한숨 쉬며 살지 않도록 나를 잘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나 기술이나 모두가 사람들을 한숨짓게 만든다면, 미래에 올 세상은 암울할 뿐이지 않을까?

        지금은 ‘인공지능’이나 Ubicomp과 같은 기술들이 사람들의 삶의 흐름을 점차 새롭게 형성해 가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이런 것들이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디스토피아 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이런 기술은 나의 삶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를 비인간적인 존재로 몰아넣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가능성과 그 주변 맥락을 새롭게 형성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불이나 농경, 그리고 인쇄기, 전기 또는 인터넷 등과 같이 모든 주요한 전환점을 이룬 발전의 도약은 사람들의 삶의 구조와 흐름을 새롭게 변화시켜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바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틀, 프레임을 새롭게 형성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흐름, 그 안에 발견되는 구조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의 리듬, 즉, 사람들이 일하고, 배우고, 사랑하고, 쉬고, 움직이고, 관계를 맺고, 생각하는 방식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리듬은 주변에 편재되어 있는 디지털 도구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데, 내가 기술에 더 의존하거나 디지털 환경에 진입한다고 해서 인간성을 잃는다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도구나 주변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로봇이 되거나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의 생활 방식이나 디지털 도구가 더 디지털화되더라도 나의 인간으로서의 본성, 즉, 나의 감정, 관계, 선택, 그리고 가치관, 즉 인간성의 핵심 요소들은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서 있는 무대가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의 생각하는 방식,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자주 내가 있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배우들이 장면에 따라 연기를 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내가 기술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나를 진정으로 사람답게 만드는 것과의 접점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깊이 느끼거나 생각하지 않고, 기계처럼 동작을 반복하거나, 그저 움직이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우려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을 정말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기술은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열어 주기도 한다. 기술로 하여금 나의 생각, 감정, 결정을 대신하게 놔 두면, 나는 수동적으로 변해 나를 둔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오히려 현명하게 그 기술들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나의 상상력을 더욱 예리하게 하고, 기억력은 더욱 강해지고, 연민은 더욱 깊어지고, 그리고 창의력은 더욱 생동감 넘치게 되어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된다. 내가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 위험이 도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내가 잊어버리는 데 있다고 말이다. 즉, 도구는 항상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내가 중심에 있어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된다면, 그 때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삶 속에 너무나도 가까워진 기술들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 내 두뇌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이나 Ubicomp과 같은 기술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이라지만, 그들이 내 세상 스토리텔링 속의 폭군이 될 필요는 없다. 대신 무대 백그라운드에서 내가 나의 삶 속에서 더 자유롭고 우아하게, 그리고 나의 삶에서 충만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무대를 설정하는 나를 위한 무대 감독이 될 수는 있다. 즉, 이러한 기술들이 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서 그 기술들은 맞춤 양복처럼 나의 삶에 들어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맞춤 제작은 바로 내가 요구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많은 기술들은 여전히 ​​하나의 크기의 양복만을 제공하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 내가 그 한계에 적응하도록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 어떤 것들은 그 기술들이 미처 갖추지 못해 나에게 구멍을 메우라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변화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에 의해서만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공지능’이나 Ubicomp과 같은 기술 외에도 나를 변하게 하는 이 새로운 세상의 다른 “주인공”들이 있다. 그래서 변화는 인류학적, 철학적, 생태적, 심리학적, 심지어 사회적이기도 하다. 즉, 기술에 의한 변화는 더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의 일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중요한 질문에 가치를 둔다. 즉,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 가치가 있는가?” 그저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서 나는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않고, 사람이기에 연약하고 복잡한 존재인 나에게 기술이 어떻게 도움이 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기술적 산출물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왜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 아는 내가 되려고 하고, 화려한 도구에 만족하지 않고 존엄성, 선택, 기쁨을 보존하는 맥락을 형성하는 것을 추구하는 내가 되고자 한다.

        나의 삶의 구조는 기술들에 의해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변화가 왜곡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삶을 세련되게 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즉, 도움이라는 서비스는 기술적 산출물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기능의 서비스가 아니라, 내가 그 도움이 필요한 그 때 그 도움을 위해 서비스는 시작이 되어야 한다.

        과연 내가 그 기술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는 바로 중심 방향은 무엇일까?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그 삶의 방식은 물론,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형성할 아주 중요한 갈림길에 나는 서 있다. 여기서부터 나의 삶이 결정되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로 이끌 것이다. 이 갈림길은 미래를 형성하는 선택의 순간과 같다. 이렇게 기술이 나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 스마트폰을 사용하거나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것과 같은 표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방식,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 내 생각이 집중되는 것, 내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 심지어 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가 형성되는 깊은 곳이다.

        그리고 기술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래도 전기나, 라디오, 자동차와 같은 새로운 발명품을 소화할 시간이라도 있었다. 그래서 그 기술들이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데 수십 년이나 걸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나를 대신하여 글을 작성해 주는 ‘인공지능’이 있고, 나의 모든 움직임을 추적하는 앱도 있고, VR, AR, MR과 같은 디지털 경험은 매우 생생하고 매력적이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거나, 혹은 실제로 어떤 장소에 대해 내가 부여하는 가치를 VR이 대체하거나 심지어 그에 버금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즉, 친구를 직접 만나고 이야기하는 대신에 VR의 세상에서 시간 보내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VR이 내 삶에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분히 현실적이 되어 물리적인 세상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데, 그것들이 나의 주변에서 모두 동시 다발적으로 내가 정신차리지 못하도록 한꺼번에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기술들이 나의 삶이 영역으로 들어오면, 나의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의미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나는 나보다 더 큰 힘과 맞서고 있으며,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내가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는지, 내가 어떻게 감정의 변화를 맞이하는지, 내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 심지어 내가 어떻게 꿈꾸는 지까지 모든 것을 바꾸어 가고 있다. 당연히 그런 종류의 급속한 변화는 나에게 압박을 가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정말 나는 이것들과 함께 어디로 가고 있다는 말인가?”, 결국 내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향하는 길의 중심 방향을 삶에 쓰이는 도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흘러가는 나의 삶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 아닐까?

        정작 내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도구가 이렇게 강력하고, 이렇게 빠르며, 내 삶 자체의 구조에 이렇게 깊이 자리잡게 된다면,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라는 것이다. 도구는 더 이상 책상이나 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구는 나의 귀에, 나의 집에, 나의 생각 속에, 심지어 나의 기억 속에까지 있다.

        디지털이 나의 개인적인 것과 합쳐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주변에 공간을 형성하고, 그리고 놀라운 기회와 심각한 위험을 동시에 모두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기술은 나에게 점점 더 강력한 도구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에, 내 두뇌가 깨어 있다면, 나는 그 기술에 끌려가지 않을 자신이 있으며, 나의 방향으로 지혜롭고 자각적으로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더욱 더 나은 관계가 구축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표현하게 되고, 서로를 더 수월하게 돌볼 수 있는 삶을 만들 수 있으며, 기술을 이용해 내 안의 최고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두뇌가 굳어 있고, 깨어 있지 않으면, 생각 없이 그것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놔 두어 이러한 도구들이 나를 기계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나의 생각이 집중되는 순간을 빼앗거나, 심지어 진정한 인간, 즉 차분하고 사려 깊고 현재에 충실한 존재가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잊어버리게 만들며, 조금씩 나에게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앗아갈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런 위험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고 싶다면, 스마트폰, 컴퓨터, 스마트 TV 같은 디바이스들을 내가 매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디지털 디바이스들은 내가 사람들과 연결 상태를 유지하고, 정보를 찾고, 더 빠르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이유도 모른 채 스크롤하거나 탭 하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디바이스를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 그 때는 내가 디바이스들에게 점령당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런 순간은 길 안내나 알림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나를 대신해서 생각하는 것까지 내가 모든 것을 디바이스에 의존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한 순간도 스마트폰을 확인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거나, 갑자기 오프라인이라도 된다면 불안해지는 마음이 커지고, 배터리가 2% 남았을 때 내가 당황하게 되었던, 기술에 매우 의존적이었던 내 자신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런 기술들이 내 생활과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으면, 쉽게 집중력을 잃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인가를 작성하거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데 스마트폰의 알림이 울린다면, 내 삶의 흐름에 그것이 제일 우선되는 것처럼 스마트폰을 확인해야 할 것 같고, 내 자신이 원래 하려던 생각의 흐름을 놓치게 된다. 이런 끊임없는 방해는 깊이 생각하거나, 제대로 일하거나, 심지어 쉬는 것조차 방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술들이 주변에 너무 가깝게 있다 보면, 내 주변에서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 즉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 공감, 침묵, 진정한 소통 같은 것을 내가 잊어버리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내가 사람들을 기계처럼 대하거나, 나 스스로도 기계처럼 하루 종일 클릭만 하고 그에 반응만 한다면, 나는 삶을 생동감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바로 그것들을 천천히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 기술들을 사용할 때, 내 두뇌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기술은 나를 서서히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기술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기술에 의존하여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 스스로가 변하고 있지는 않은 지 자주 고민해 보고, 디지털 도구를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기술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도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다만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나의 두뇌를 깨워야 내가 그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인류가 향하는 핵심을 건드리는 것은 실제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표현이 될 수 있다. 단순하게 디바이스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그치지 말고, 나의 인식을 업그레이드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여전히 그러한 이끌림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기술이 너무 빨리 변해서 나의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알아차리게 되었다면,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심오한 질문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길은 어느 길일까? 그래서 나는 미래에 어떤 삶을 살까?”

        기술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그 기술을 가지고 상업적인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기술의 발전에 대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부분까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만 이런 생각한다면, 나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따라가다가 이용당하는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는 사용자일 뿐이란 것인가? 하지만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 의견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새로운 미래의 디지털 공간에 대해 공유하려고 스토리텔링을 이어가고 있는 바로 그 이유이다. 특히 강력한 기술이나 큰 사회적 변화와 관련된 경우 더욱 그렇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듣는 것이 아니다. 즉 미래는 소수의 사람에 의해 통제되거나 강요되어서는 안 되며, 많은 사람에 의해 함께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 아이가 컴퓨터 디바이스와 인공지능으로부터 배우는 것보다는 실제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는 “이 기술을 사용해서 내 삶이 더 피곤하게 되고, 나 스스로 공허감을 가지게 하고, 나의 삶에서 더 멀어지고 무감각해지는 것보다는, 이 기술이 나를 더 깨어 있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 연결된 느낌을 주며, 내가 더 살아 있는 기분을 가져 내 삶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나는 기술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조종하게 놔 두는 것보다, 내가 나의 선택으로 기술을 사용하고 통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는 “이 기술이 나를 그냥 바쁘게 만들어 오히려 사람들과 내가 더 멀어지게 만들게 하는 것보다, 정말로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람들이 서로를 더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관한 문제이고, 내가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계속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려고 한다. 나는 주변에 어차피 있어야 할 디지털 공간이라면,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해서 나를 보호해 주고, 나에게 도움을 주고, 또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MASERINTS를 디자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기술은 내가 더욱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될 때에만 유용하다고 말이다.

        내가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든 환영하지 않든, 나는 이 변화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을 내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해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우선 나의 생각이 지나간 세상에 뿌리를 두고 그곳에 얽매어 있다면,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패턴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패턴이 너무 자주 반복되어 눈에 띄지 않는 굳어진 습관 속에 살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패턴은 내가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한다. 이것이 함정인 것이다. 내가 나의 생각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면서, 발견을 제한하게 되는데, 발견이 제한되면 창의성은 고갈된다.

        오래 전 한때 계산하는 도구에 불과했던 컴퓨터조차도 이제는 발견하고 창출도 한다. 스스로 학습한다는 시스템은 데이터의 패턴을 파악하고, 이상 징후를 감지하며, 심지어 예술, 음악, 디자인과 같이 완전히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처리 능력, 즉 컴퓨터나 ‘인공지능’ 시스템의 강점이 얼마나 빨리 계산하고,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을 정말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그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첫째, 그들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둘째, 그들은 정보를 효율적으로 정리한다. 셋째, 그들은 패턴을 검색하고 가능한 여러 가지 많은 솔루션을 빠르게 시도할 수 있다. 따라서 강점은 단순히 속도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탐색하고 활용하는 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이미 본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검색하는 구조화된 방식과 그것을 사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방식인 것이다. 그래도 가장 큰 강점은 절대 작은 것이라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컴퓨터의 방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기계처럼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내가 습관처럼 생각하고 배워온 방식에 대한 도전을 하는 것이다.

        컴퓨터는 차갑고, 논리적이어야 하며,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컴퓨터가 매우 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보를 정리하고, 자료와 정보를 탐색하고, 그로부터 학습도 하고, 패턴을 찾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간과할 수 있는 것까지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합에 대해 가능성을 가지고 시도하는 것에 매우 능숙하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습관을 배운다면 어떨까? 체계적으로 가능성을 파헤치고, 세부 사항을 기억하고, 과거 경험을 연결하는 습관을 배운다면, 내 자신이 실제로 더 개방적이고, 더 사려 깊고, 더 완전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로봇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호기심을 가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내가 다시 깨어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방법을 시도해 본다면 어떨까? 마치 어린 시절에 했던 것처럼, 또는 지금의 스마트한 컴퓨터가 하는 것처럼, 어떤 기억 속에 있는 세계로 탐험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진정한 감정과 인간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목 차

프롤로그
떠오르는 기억들의 알 수 없는 연관성
추가설명자료: 메워지는 경험(Filler)의 정체

  1. 스마트한 사람이 되려면
    추가설명자료: DAGENAM의 접근 방법
    추가설명자료: 경험의 창출
  2. 신기한 두뇌의 작업
    2.1 편해진 삶 속에 굳어진 나의 두뇌
    추가설명자료: 나이를 먹게되면 굳어지는 두뇌
  3. 스마트하다는 표현의 속 뜻
    3.1 스마트한 사람과 ‘간접경험’의 존재
    3.2 ‘간접경험’과 기억의 자국
    3.3 ‘단위경험’이란?
    3.4 ‘단위경험’이 많아지면, 창의성에 유연성이 증가
    추가설명자료: 기억의 깊은 자국
    추가설명자료: ‘대체경험’과 기억의 깊은 자국
    추가설명자료: 나의 스마트한 디지털 공간
    추가설명자료: ‘단위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추가설명자료: 내연기관의 부품수
    추가설명자료: 습관과 덩어리 경험
    추가설명자료: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란
  4. 깨어있는 두뇌와 디지털 공간과의 공존
    4.1 나의 삶의 흐름과 너무 가까워진 기술들
    4.2 내가 기술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추가설명자료: 내 주변에 꽉 찬 속이 검은 디지털 공간
    추가설명자료: 디지털 공간의 위험성
    추가설명자료: UCA(Ubiquitous Computational Access)
    추가설명자료: ‘인공지능’ 기술의 현재 수준 판단
    추가설명자료: ‘증강현실’ 기술의 현재 수준 판단
    추가설명자료: ‘Ubicomp’ 기술의 현재 수준 판단
    추가설명자료: 기술들이 사람들의 삶의 흐름을 점차 새롭게 형성해 가고 있다
  5. 두뇌를 깨우는 간단한 방법
  6.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을 발견하는 것
    6.1 두뇌의 깨어남과 ‘주체적행동능력’의 회복
    추가설명자료: 맥락이 모든 것을 결정
  7. 컴퓨터는 어떻게 경험을 발견하고 창출할까?
    7.1 컴퓨터는 경험을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8. 두뇌 어딘 가에 있을 잊혀 진 그 무엇을 찾아서
    8.1 나의 하루가 미래의 시나리오가 될 때
    추가설명자료: 인간의 인식 능력
  9. 경험을 발견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
  10. 창출을 경험한다는 것?
    10.1 창출의 시도
    10.2 ‘두뇌동작 시뮬레이션’을 위한 도표

에필로그
과거의 경험과 새로운 경험의 만남

Last Updated on 2025년 11월 02일 by MASER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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