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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004.08. 삶의 흐름과 너무 가까워진 기술들

완전하지는 않아도 인공지능 시스템이나, Ubicomp과 같은 기술이 사람들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우려가 되는 것은 만약 두뇌가 습관에 갇혀 사람들 자신도 모르게 굳어져 간다면, 주변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디지털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새로운 디지털 세상이 온다는 이야기는 계속 들려오고, 그리고 실제로 디지털이 꽉 찬 새로운 디지털 세상의 징조는 이미 일부 보이기도 한다. 인공지능, 증강현실, Ubicomp 등과 같은 기술은 어디를 가 봐도 쉽게 접하는 이야기가 되었고, 물론 완전히 내 주변에 와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일부가 이미 와서 주변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MASERINTS라는 디지털 공간의 개념적 디자인은 기술적 산출물들이 가지는 기능으로부터 시작된 그 기능에 대한 ‘서비스’라는 개념을,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요구와 필요에 의해 제공되는 진정한 또 다른 의미의 ‘서비스’의 개념, 즉 더 이상 ‘서비스’라 불리기 않고 지원과 도움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이 되었다.

MASERINTS가 제공하는 디지털 공간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계속해서 점점 더 사람들의 삶의 흐름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MASERINTS의 디지털 공간 안에서는 MASERINTS의 지원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주인공인 PTS(Person to be served)가 중심이 되고, PTS에게 적합한 지원과 도움을 제공하며, PTS의 삶의 흐름이 안정될 수 있도록 영향을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내 뱉는다. 물론 그런 간절함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제대로 세상에 푹 젖어 세상이 바라는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 세상은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MASERINTS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한숨 쉬며 살지 않도록 사람들을 잘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나 기술이나 모두가 사람들을 한숨짓게 만든다면, 미래에 올 세상은 암울할 뿐이지 않을까?

지금은 인공지능이나 Ubicomp과 같은 기술들이 사람들의 삶의 흐름을 점차 새롭게 형성해 가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이런 것들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디스토피아 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이런 기술은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존재로 몰아넣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가능성과 그 주변 맥락을 새롭게 형성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불이나 농경, 그리고 인쇄기, 전기 또는 인터넷 등과 같이 모든 주요한 전환점을 이룬 발전의 도약은 사람들의 삶의 구조와 흐름을 새롭게 변화시켜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바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틀 혹은 프레임을 새롭게 형성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흐름, 그 안에 발견되는 구조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의 리듬, 즉, 사람들이 일하고, 배우고, 사랑하고, 쉬고, 움직이고, 관계를 맺고, 생각하는 방식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리듬은 주변에 편재되어 있는 디지털 도구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데, 사람들이 기술에 더 의존하거나 디지털 환경에 진입한다고 해서 인간성을 잃는다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도구나 주변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로봇이 되거나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나 디지털 도구가 더 디지털화되더라도 사람들의 인간으로서의 본성, 즉, 사람들의 감정, 관계, 선택, 그리고 가치관, 즉 인간성의 핵심 요소들은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서 있는 무대가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식,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행동이 자주 사람들이 있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배우들이 장면에 따라 연기를 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기술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람답게 만드는 것과의 접점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깊이 느끼거나 생각하지 않고, 기계처럼 동작을 반복하거나, 그저 움직이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우려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을 정말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기술은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열어 주기도 한다. 기술로 하여금 사람들의 생각, 감정, 결정을 대신하게 놔 두면,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변해 둔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오히려 현명하게 그 기술들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욱 예리하게 하고, 기억력은 더욱 강해지고, 연민은 더욱 깊어지고, 그리고 창의력은 더욱 생동감 넘치게 되어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된다. 사람들이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 ‘위험’이 도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사람들 스스로가 잊어버리는 데 있다고 말이다. 즉, 도구는 항상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사람이 중심에 있어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된다면, 그 때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삶 속에 너무나도 가까워진 기술들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 두뇌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이나 Ubicomp과 같은 기술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이라지만, 그들이 사람들 각자의 세상 속의 폭군이 될 필요는 없다. 대신 무대 백그라운드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더 자유롭고 우아하게,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충만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무대를 설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무대 감독이 될 수는 있다. 즉, 이러한 기술들이 사람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서 그 기술들은 맞춤 양복처럼 사람들의 삶에 들어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맞춤 제작은 바로 사람들 각자가 요구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많은 기술들은 여전히 ​​하나의 크기의 양복만을 제공하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 사람들 각자가 그 한계에 적응하도록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 어떤 것들은 그 기술들이 미처 갖추지 못해 사람들에게 구멍을 메우라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사람들에게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변화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에 의해서만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공지능이나 Ubicomp과 같은 기술 외에도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 이 새로운 세상의 다른 ‘주인공’들이 있다. 그래서 변화는 인류학적, 철학적, 생태적, 심리학적, 심지어 사회적이기도 하다. 즉, 기술에 의한 변화는 더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의 일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중요한 질문에 가치를 둔다. 즉,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 가치가 있는가?” 그저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서 나는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않고, 사람이기에 연약하고 복잡한 존재인 나에게 기술이 어떻게 도움이 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기술적 산출물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왜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 아는 내가 되려고 하고, 화려한 도구에 만족하지 않고 존엄성, 선택, 기쁨을 보존하는 맥락을 형성하는 것을 추구하는 내가 되고자 한다.

나의 삶의 구조는 기술들에 의해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변화가 왜곡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삶을 세련되게 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즉, 도움이라는 서비스는 기술적 산출물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기능의 서비스가 아니라, 내가 그 도움이 필요한 그 때 그 도움을 위해 서비스는 시작이 되어야 한다.